이헌익 선배님을 보내며

고 이헌익 중앙일보 부국장 추도사



   
 
    고 이헌익 부국장  
 
본보는 지난 17일 불의의 사고로 숨진 중앙일보 이헌익 부국장을 기리는 추도사를 싣는다. 이 추도사는 박정호 문화부 차장이 작성했으며 20일 서울 순화동 중앙일보 사옥 앞에서 열린 노제에서 낭독됐다.


이헌익 선배님을 보내며

선배님, 이헌익 선배님. 올해도 어김없이 봄날은 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헌익이란 정겨운 이름 석 자를 영원히 가슴 속에 묻는 날입니다. 1994년 제가 문화부에 온 이후 만났던 이헌익 차장, 이헌익 부장, 이헌익 국장, 이헌익 문화전문기자에 붙은 타이틀은 잠시 잊겠습니다. 오늘만은 오직 선배님으로 기억하겠습니다.


선배님,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선배님께서 지난 28년 동안 청춘을 불살랐던 중앙일보 사옥 앞에 서 있습니다. 영정 속의 선배님이 지금 당장이라도 이곳으로 걸어 나와 “지금 무슨 일이야”라며 씨익 한번 웃으시며 예의 그 다정했던 목소리를 들려주실 것 같습니다.


선배님, 이헌익 선배님.
참으로 나쁘십니다. 어찌 이렇게 갑자기 가실 수 있으십니까. 최소한 우리에게 선배님의 마지막을 준비할 시간을 주셔야 하지 않으십니까. 열흘 전 선배님께서 바로 집 앞에서 쓰러지셨다는 비보는 지금도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쇠방망이로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선배님을 저 세상으로 보내드리는 깊은 슬픔에 쌓여있습니다. 이 비통한 마음을 몇 마디의 말로 어떻게 달랠 수 있겠습니까. 진정, 하늘도 무심하십니다. 젊음의 열정을 바쳤던 중앙일보에서 정년을 맞으실 날도 이제 반 년 밖에 남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선배님.
제가 경험하고, 또 앞으로 마음에 새길 선배님은 정말 자유인이셨습니다. 사무실에서 후배들을 지도하든, 술자리에서 후배들을 격려하시든 선배님은 언제나 딱딱한 틀과 고정된 형식에서 벗어나 항상 열린 마음, 그리고 따듯한 가슴으로 우리를 아껴주셨습니다.


선배님, 선배님께선 왜 또 그리 재주가 많으셨나요. 영화면 영화, 음악이면 음악, 그림이면 그림, 문학이면 문학, 종교면 종교, 선배님은 이 시대의 걸출한 문화부 기자요, 나아가 진정한 르네상스인이었습니다. 선배님과 마주 앉아 열띤 토론을 나누고, 또 시대를 아파했던 선배, 동료, 후배들, 그리고 문화계 인사를 일일이 셀 수는 없을 겁니다.


선배님, 선배님은 우리 시대의 훌륭한 가객이셨습니다. 술 한 잔 들어가면 울려나왔던 그 구성진 목소리를 우리는 이제 들을 수 없습니다. 시도, 소설도, 가요도, 팝송도, 또 정신을 번쩍 들게 했던 숱한 법어도 이제 모두 마음속에 담아두렵니다.


선배님, 선배님은 개구쟁이였습니다. 기억나십니까. “한글로 이름이 넉 자인 할리우드 여배우 10명을 꼽아봐라, 히말라야 8000m 고봉 14개의 이름을 들어봐라” 등 후배들의 기를 죽이는 데 선수셨습니다. 선배님의 그 장난기 섞인 질문에 즐거워했던 게 바로 어제 일 같습니다.


선배님. 선배님은 무엇보다 100% 기자이셨습니다. 그 빼어났던 노래실력도, 일필휘지 쓱쓱 그어 내려갔던 그림실력도, 밤 새워 잔을 비웠던 음주실력도 기자 이헌익의 ‘문장’에 비해선 모두 장식물에 불과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선배님의 글 솜씨는 소설가 최인호씨도 부러워할 정도이셨죠.


기자 이헌익을 만든 건 사람에 대한 사랑과 끝없는 공부였습니다. 선배님 주변에는 항상 사람이 가득했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샘터, 또 요즘의 난다랑 등에서 선배님과 마주치지 않은 중앙일보 식구가 있었을까요. 그런 와중에도 선배님은 항상 손에 책을 들고 계셨습니다.


선배님, 저는 선배님만큼 사람을 좋아했던 사람을 잘 알지 못합니다. 저희 후배들에게도 마찬가지셨죠. 장난기 가득한 기습 주먹에 가끔씩 놀라기도 했지만 그 작고 깊은 눈에서 쏟아졌던 선배님의 애정 앞에선 모두 무장해제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별과 차이를 두지 않고, 그러면서도 사회현안에 늘 긴장을 놓치지 않았던 선배님은 분명 우리 후배들이 본받아야할 귀감이 될 것입니다.


선배님, 기자 이헌익과 관련된 에피소드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성철 스님일 것입니다. 1993년 중앙일보 석간시절, 종교를 맡은 지 얼마 안됐던 때, 그것도 뒤늦게 성철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들었던 선배님께선 지금도 회자되는 기사를 쓰셨습니다.


성철 스님께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고 하셨습니다. 또 열반송에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고 깨우치셨습니다. 선배님께서도 이제 평생의 모든 업보를 다 잊으시고, 평소 그렇게 자주 말씀하셨던 산과 물의 세계에 편안히 잠드시기를 바랍니다.


선배님의 일산 백병원 빈소에 들르셨던 백기완 선생께선 부의 봉투에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를 도저히 쓸 수 가 없어 “정말 원통합니다”라고 쓰셨습니다. 100번째 영화 ‘천년학’의 개봉을 앞둔 임권택 감독께서도 “선배님의 당당한 모습을 멀리서 늘 존경했왔다”고 하셨습니다. 선배님을 저 세상으로 보내는 우리들의 심정도 이와 똑같습니다.


선배님, 부디 안녕히 가십시오. 그리고 1년 전 세상을 먼저 떠났던 사모님과 그간 못 나누셨던 회한을 마음껏 푸시길 바랍니다. 저희 후배들도 이제 눈물을 거두렵니다. 선배님, 그동안 정말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많이 사랑했습니다.
2007년 3월 20일


박정호 중앙일보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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