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호 특집] 기자협회와 나

35년 언론역사의 창조자이자 기록자

두 차레 폐간 겪으며 '언론자유 수호' 한 길...'협회 기관지'로 머물지 않도록 늘 자성해야





정진석 교수는 1966년 1월, 지령 11호부터 1977년 12월 31일자로 기자협회를 그만 둘 때까지 12년간 편집간사, 편집실 차장을 거쳐 71년 편집실장을 역임하면서 기자협회보를 제작했다. 정 교수가 <기자통신> 5월호에 기고한 '기자협회보 1000호 발행의 언론사적 의미' 제하 글을 요약 게재한다. 편집자주

기자협회보는 언론 역사의 창조자이면서 동시에 기록자이기도 하다. 기자협회보는 기자협회가 창립된 지 3개월 후인 1964년 11월 10일 대판 4페이지의 월간으로 창간되었다. 한국의 언론사상 일선기자들이 발행하는 신문이 35년의 나이테를 쌓으면서 지령 1000호를 기록한 것은 초유의 일이다.



기자협회보는 발행의 주체인 기자협회의 기관지 역할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전체 언론계를 대변하였으며 언론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열린 토론의 광장이었다. 기자협회의 사업을 이끈 견인차로서 전국에 흩어진 수천명 회원을 결속시키는 강력한 연결고리였다. 언론개혁을 주도하는 캠페인 역할도 맡았다.



초창기에 한국 언론계를 대변하는 신문이 되었던 것은 언론계를 대변할 수 있는 다른 매체가 없었다는 상황적 요인도 작용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 여러 개의 언론전문지가 나타나면서 더러 기자협회만의 신문으로 입지를 스스로 제한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때도 있다.



창간 당시에는 기자협회 강령인 언론인의 자질향상, 언론자유 수호, 권익옹호, 국제교류 추진을 편집의 대강(大綱)으로 삼았다. 창간호는 기자협회가 언론윤리위원회법 반대투쟁의 와중에서 출범하기까지 경과와 투쟁 내용을 정리했다. 2호부터는 사이비기자 일소를 비롯하여 언론인의 권익옹호 등 언론의 현안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이러한 편집 방침은 10년 후인 1974년 무렵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초기 기자협회보에는 광고가 없었다. 기자협회는 회원들의 회비가 유일한 수입원이었기 때문에 살림은 언제나 궁핍했다. 외부의 지원을 받지 않고 회비만으로 꾸려가며 만드는 신문이었기에 어쩌면 더 순수했을지도 모른다.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1968년부터 편집실을 독립기구로 만들어 8월 3일 지령 40호부터는 주간으로 발간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편집실 인원은 3명이었다.



기자협회보는 우리나라 언론사상 기자단체에서주간으로발행한 최초의 언론전문지다. 1948년 4월 15일에 창간된 조선기자협회의 '협보(協報)'라는 타블로이드 신문이 있었지만 불규칙하게 3호까지 발행한 후 곧 사라졌다. 편집인협회에서는 1957년에 '편집인협회보'를 창간하였으나 1년에 한번 꼴로 발행하다가 월간으로 발행하고 있었다.



기자협회보 주간 발행의 의미를 부여한다면 첫째는 시의성(時宜性)을 갖추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주간 발행을 통해 언론계 소식을 신속하게 보도하고, 일어나는 사태에 즉각 반응하여 여론을 조성할 수 있는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70년대 각 언론사에서 언론자유 수호운동이 확산될 수 있었던 원동력도 실은 기자협회보의 시의성 있는 보도와 여론조성의 결과였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들의 경영주와 대결도 기자협회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양 신문의 경영주들이 이를 지적했었고, 정부 당국이 두 차례씩이나 폐간조치를 취했던 것도 기자협회보의 힘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함이었다.



지령 100호를 맞았을 때에 당시 동아일보 주필 천관우 선생은 기자협회보가 기자들의 기백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기자협회보, 1969. 10. 3.)



200호를 맞았을 때에도 조선일보 주필 최석채 선생은 "편집의 자주성이라는 '평범한 원칙'을 지키는 것으로 '신문의 신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우리 언론계의 소금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기자협회보, 1971. 9. 24.)



기자협회보 주간 발행의 또 다른 의미는 주간 발행 그 자체가 언론 자유의 신장을 위한 격렬한 투쟁이라는 사실이었다. '신문통신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제3조 4항)에 의하면 '주간 신문의 발행에 있어서는 윤전기 1대 이상과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부수 인쇄시설'을 갖추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기자협회로서는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시설이었다. 정부는 이 조항을 언론 통제의 장치로 악용하였다. 기존 언론에 대해서는 과점적 특혜를 제공한 반면 새로운 매체의 시장진입을 막아 다양한 의견이 출현하지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위헌의 소지까지 내포한 독소조항으로 악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기자협회보는 당국의 등록을 필하지 않은 채 주간발행을 강행했다. 이는 실정법 위반이었지만 발행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제한하는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정면으로 저항하는 행위였다.



문공부는 1973년7월,월간으로 발행 간격을 환원하라고 지시해 한 때 월간으로 후퇴하였지만 1974년 2월 7일에는 정식으로 주간 등록을 허용했다. 이에 따라 기자협회보는 2월 22일자(지령 300호)부터 주간으로 정식 발행했으나 이듬해 3월 10일에는 최악의 행정처분인 폐간, 즉 '등록취소'를 당하게 되었다.



기자협회보가 없는 기자협회는 존재의의를 상실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발행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뉴스레터 형식으로 '기자협회 회원 여러분께 알리는 소식'이라는 '알림'을 활판인쇄, 프린트, 사진식자 마스터 방식으로 인쇄하여 기자협회 활동과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들의 투쟁소식을 기록으로 남겼다. 처음 활판인쇄를 해준 서울신문 외간부(外刊部) 담당자가 당국의 압력을 받아 인쇄를 거절하는 바람에 기사를 들고 다니며 명동성당의 사진식자 시설을 이용하여 인쇄를 계속했다. 그러나 기자협회 회장단이 당국에 연행되었다가 전원 사퇴하면서 당국의 지시로 이 '알림'조차 중단 할 수밖에 없었다.



1975년 12월 1일 352호부터는 월간으로 복간했으나 폐간된 간행물은 2년 동안 동일 제호를 사용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기자협회보라는 제호를 쓸 수도 없었다. 고심 끝에 '기협회보'라는 제호를 택해서 월간등록을 마칠 수 있었다. 2년 후인 1979년 1월 29일자로 기자협회보라는 제호를 다시 찾았으나 주간 발행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고 13년 동안 월간에 머물러야 했다.



1980년 '서울의 봄' 시기, 기자협회보는 '계엄철폐-검열철폐-제작거부' 운동을 펼쳤다. 결국 5월 17일 계엄령 선포와 함께 기자협회 집행부와 편집실 기자들이 구속되었고 7월 31일에는 마침내 두 번째로 등록이 취소되는 탄압을 받았다.



기자협회보가 복간된 것은 1981년 7월 10일 411호부터였으며, 6·29 선언 이후인 1988년 2월 26일 다시 주간으로 등록됐다. 기자협회보는 1966년 8월 15일(지령 16호)부터 대판 4면에서 타블로이드 8면으로 판형을 줄였는데 1992년 8월 20일자(697호)부터 대판으로 다시 확대했으며 이때부터 광고를 게재하기 시작했다. 또한 1996년 1월 1일자(850호)부터 가로쓰기 체제로 바꾸면서 한글 전용으로 제작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여러 종류의 언론 전문지가 나타났다. 1988년 11월 프로듀서연합회는 월간 '프로듀서'를 창간한 이래 1995년 4월 6일(69호)부터 격주간 신문형태로판형과발행간격을 바꾸면서 제호도 '프로듀서연합회보'로 바꾸었다. 1989년 1월 17일에는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에서 '언론노보'를 창간했다. 이에 따라 기자협회보도 독점적인 언론전문지가 아니라 '언론 3단체가 발행하는 신문 가운데 하나'로 위상이 바뀌게 되었다. 언론노보는 1995년 3월 9일자(276호)를 마지막으로 '미디어 오늘'이라는 새로운 언론전문지에 그 역할의 대부분을 넘겼다.



기자협회보로서는 자연스럽게 경쟁매체가 있다는 의식을 떨쳐버릴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유일한 언론전문지였던 시절과는 달리 스스로의 특성을 살리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처했다.



지령 1000호를 발행하는 기자협회보는 앞으로 새로운 각오가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자협회라는 특정 집단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신문이 되지 않도록 늘 자성하는 자세이다. 최근에 발행된 기자협회보에는 앞으로 기자협회보를 어떻게 편집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토론하는 모임이 더러 보인다. 바른 길로 가고자 하는 고뇌, 모두가 동참하는 언론개혁을 추구하려는 조용한 몸부림으로 보고싶다. 그래야 한다.



근년에는 기자협회보의 논조와 칼럼 가운데 지나친 편견과 설익은 독선을 흔히 보았다. 보도의 자세가 공정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전체 언론계의 중진들이 기자협회보의 논조와 역할에 공감하던 60년대와 70년대의 지지를 회복할 수는 없을까.



언론개혁은 거스를 수 없는 역사적인 요구다. 기자협회보가 추구해온 목표가 그것 아니었던가. 그러나 대안 없이 개혁을 요구하는 사람들만이 옳다는 독단도 스스로 경계할 줄 알아야 한다. 언론개혁을 직업적으로 외치는 스타 같은 언론비평가들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아닌지 냉철한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언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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