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현재 1백37개사 7천2백여명

창립 당시 보다 4.7배 증가
기자협회 회원수 변천사


   
 
  ▲ 75년 3월 29일 기협의 언론자유수호투쟁을 이끌었던 김병익 회장이 제12차 대의원대회에서 재선돼 인사말을 하고 있다.  
 
1964년 8월 17일, ‘한국기자협회’가 창립하기까지 산고는 컸다. 7월말 현재 한국기자협회 회원사 수는 1백37개사에 회원 수는 7천 2백50여명. 창립당시 40개사 1천5백33명의 회원으로 시작했던 기협은 42년 동안 4.7배의 회원 수를 배가해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최대 기자들의 모임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당시 기자들의 모임체 구성이 절실하게 요구됐던 언론의 위기상황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심각해졌고 그 같은 계기를 통해 단체결성을 꾀하는 시도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언론 외적인 압력과 언론 내부의 여건 미성숙, 추진력 결여 등의 이유로 번번이 좌절되곤 했다. 특히 기자협회가 창립되기 이전까지 언론은 장기집권을 꾀하는 자유당 이승만 정권의 최대걸림돌로 지목돼 압박의 희생양이 돼왔다.

그만큼 한국기자협회의 40 여년 세월은 정치적 탄압과 억압을 극복한 회원사들의 역사만큼이나 파란만장했다. 한국기자협회의 등장은 기자들의 노력과 투쟁의 결실이었다.

기협 창립 이전

뜻있는 일부인사들이 언론인들의 결속 필요성을 절감하고 독립신문 창간 61주년을 맞는 1957년 4월 7일 ‘한국신문편집인협회’를 결성, 언론자유수호와 언론윤리향상에 대한 응집력을 확보하는 등 본격적으로 기자협회의 기틀을 이루어 나갔다. 이른 바 기자협회 설립의 시초라고 봐도 무관하다. 이후 국회출입기자들을 중심으로 한 ‘정치기자협회’가 61년 10월 소공동에 있는 중앙공보관 회의실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새로이 출범했다. 정치기자협회는 훗날 기자협회의 모태가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드디어 64년 8월 17일 오후2시 신문회관 3층 강당에서 각계의 축하를 받으면서 ‘한국기자협회’가 공식 출범했다. 서울시내에 있는 17개 신문, 통신, 방송사 기자 2백여명과 홍종인 등 언론계 선배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창립총회는 말 그대로 감격의 장이었다.

창립 3개월 만에 기협은 조선일보 기자 1백21명을 비롯한 40개사 1천5백33명의 기자들이 가입하는 실적을 올렸다. 기자협회 창립 40주년이 되던 지난 2004년 8월 기협 회원은 1백39개사 6천9명으로 배가되더니 42년째인 7월말 현재 1백37개사 7천 2백50여명.

이는 창립 당시와 비교할 때 회원사는 3.4배, 회원 수는 4.7배 정도 증가한 것이다.

언론탄압 시절

한국기자협회는 창립 1년 뒤인 65년, 39개사 1천8백39명으로 회원사가 1개 줄어들었다. 66년에는 신아일보와 중앙일보, 현대경제가 새로 가입했으나 대구경제와 호남일보의 탈퇴로 40개사 1천9백41명의 회원을 보유했다. 이후 경기일보와 매일경제 등 새로운 회원사의 지속적인 증가로 70년에는 47개사 2천8백66명의 회원이 소속된 명실상부한 언론계 최대 모임체로 자리 잡았다.

70년대 기자협회는 언론전반의 침묵과 굴절에 대해 양심 있는 기자들의 분노가 폭발하는 시기를 맞게 된다. 유신헌법이라는 파시즘적 체제를 한층 강화시킨 박 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 일선기자들이 마침내 ‘자유언론수호선언’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통한 성찰적 투쟁으로 맞섰던 것.

72년 3월 프레스카드 발급과 관련된 비위사실로 자진 폐간된 대구일보를 비롯 같은 해 4월 경영난을 이유로 대구경제일보가, 73년 3월에는 운영난을 이유로 한국경제일보 폐간됐다. 또 같은 해에는 재정난을 이유로 동화통신이 폐간됐으며, 대한일보는 김연준사장 구속과 동시에 폐간조치됐다.

지방에서도 대전일보와 중도일보가 충남일보로 통합됐으며, 호남매일도 경영상 이유로 폐간됐다. 또 전북일보와 전북매일, 호남일보가 전북신문으로 통합됐고 AK뉴스 폐간, 경기일보와 경기매일, 연합신문의 경기신문으로 통합 등이 줄을 이었다. 기협 역시 74년 회장단이 타의에 의해 사퇴해야했으며 기자협회보는 강제 폐간됐다. 기협창립 이래 최대 위기였다. 그 결과 75년 44개사에 3천37명의 회원수를 기록했던 기협 조직은 76년 29개사 2천3백31명으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유신정권의 언론탄압은 해를 거듭할수록 심해져 77년에는 29개사 1천8백10명만이 회원으로 남게 돼 64년 기자협회 창립된 이래 가장 적은 회원 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80년대는 신군부의 강압적인 탄압과 맞서 싸워야하는 시기였다. 기협회장단의 강제구인, 대대적인 언론통폐합조치, 언론인 숙정, 언론기본법 제정, 보도지침 등으로 대변되는 ‘언론순치’를 명분으로 한 신군부세력의 강제력에 침묵했던 무력감 짙은 세월이었다. 80년대 5공 정권은 체제 저항적인 언론인을 대량숙청한데 이어 80년 11월 언론 통폐합을 강행함으로써 통제구도를 간편화하기 시작했다.

80년 11월 언론통폐합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회원사의 이탈 및 언론사 강제 휴·폐업이 잇따라 불과 1년 뒤인 81년에는 15개사 1천3백60명으로 절반 이상 회원 수가 줄어드는 위태로운 순간을 맞기도 했다.

6·29 선언 이후

87년 이른바 6·29선언을 전후해 언론자유수호활동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각 언론사에 번지기 시작한 언론노동조합운동, 언론자유실천선언과 때를 같이해 기협도 자유언론수호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87년 6월 항쟁에 부딪쳐 6·29선언이라는 비상선언을 내놓음으로써 위기에서 비켜선 뒤 집권에 성공한 노태우 정권은 5공 언론정책의 외형만을 다양한 방식으로 재정비했을 뿐, 언론을 장악하려는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6공 출범 이전인 87년 11월 국회는 언론기본법을 폐지하고 새롭게 ‘정기간행물의 등록에 관한 법률’ ‘방송법’ 등을 제정했다. 이어 문공부의 홍보정책실과 프레스카드제가 폐지됐고 주재기자의 부활이 이어졌다. 하지만 정권의 바람과 달리 언론자유수호라는 공통된 목적과 이상을 실현하려는 전국 기자들의 결집은 계속됐다. 86년 38개사 2천9백86명이던 회원 수는 언론에 대한 개방정책이 가시화 된 90년에는 77개사 4천4백47명으로 2배 이상 증가했다.

이후 국민의 정부를 거치며 기자협회는 30주년을 맞았던 지난 94년 94개사 6천3백21명이 회원으로 가입해 당시까지는 역사상 최다 회원 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90년대 이른바 ‘IMF 사태’를 거치면서 언론사들의 구조조정과 휴·폐간이 이어져 지방사들이 큰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또 2000년대 들어서서는 인터넷 매체 폭발적 성장 등 새로운 언론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신문사들이 전반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으며 폐간과 복간을 거듭하고 있다.

지난 2004년 말 충청일보가 폐간됐다 다시 다음해 5월 이전 충청일보 구성원들이 모여 새충청일보를 창간하고 스포츠투데이도 올 2월에 폐간절차를 겪음으로써 회원사는 지난 2004년보다 2개사가 줄게 된다.

하지만 2006년 들어 전년도와 비교, 무려 1.6배나 회원 수가 배가된 KBS는 2005년도 2백5명의 회원에서 현재 4백2명으로 증가돼 1백37개 회원사 중 가장 많은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또 지난 10일에도 MBC 영상취재기자 20명이 기협 회원으로 새로이 가입하는 등 8월 초 현재 7천2백50여명의 역대 최대 회원 수를 기록하고 있다.

이밖에도 연합뉴스가 4백1명으로 두 번째로 많은 회원 수를 보유하고 있으며 YTN이 2백5명, 경향신문 1백83명, 동아일보 1백76명, 한국일보 1백50명, 매일경제신문 1백46명 순으로 대부분의 보도국과 편집국 기자들은 기자협회 회원에 가입하고 있는 추세다.

지방에서도 부산의 부산일보가 1백19명, 국제신문 1백2명, 경기도의 경인일보 96명, 경기일보 81명, 대전·충남의 대전일보 90명, 충청투데이 85명 등의 높은 회원가입률을 나타내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42년의 역사 속에서 기자들과 함께 아픔도, 기쁨도 나눠 온 기자협회는 또 다른 40년을 위해 회원사들과 함께 미래를 준비해 나가고 있다. 이종완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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