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국가의 통일 과정에서 정상간의 만남이 중요한 분기점이 돼 왔음을 근세 역사는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독일이 그랬고, 예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유일 지배 체제인 북한의 실정을 감안할 때 남북 정상간의 만남은 독일이나 예멘의 통일사에서 차지하는 그것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발표 시점이나 이면합의 여부를 둘러싼 논란에도 불구하고, 남북 정상회담 자체에 대해서는 정파나 사상을 초월해 민족 구성원 모두가 환영해 마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남북 정상회담은 이제 원칙적인 합의만 했을 뿐 아직 의제설정도 못한 상태다. 실제로 만남이 이뤄지고 또 기대만큼 성과를 끌어내기까지는 넘어야 할 난제들이 적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94년과 같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더라도 남은 두 달 동안 예기치 못한 문제로 회담을 그르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사소한 문제도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남북 정상회담이 통일의 실질적인 디딤돌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데는 언론의 역할이 정부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고려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정부나 자칫 들뜨기 쉬운 국민들에게 보다 차분하고 정제된 시각으로 올바른 방향을 잡아줄 책무가 바로 언론에 있다.
그러나 정상회담 발표 후 지금까지 우리 언론이 보여준 태도는 적지 않은 우려를 갖게 한다. 국민은 차분한데, 언론이 오히려 한껏 들떠 있다. 북한과 관련된 것이라면 하나라도 더 찾아내 무조건 키우고 보자는 식의 무책임한 보도가 판을 치고 있다. 심지어 휴전선 주변 땅값이 들썩거린다는 기사가 정상회담 발표 다음날 신문에 실릴 지경이다. 신문이나 방송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통일이 곧 이뤄질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앞으로가 더 문제다. 언론이 이런 선정주의적 보도태도를 버리지 않는다면 정상회담이 열리기까지 앞으로 두 달 동안 기자들은 한건주의식 특종경쟁에 내몰릴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리고 그 결과가 ‘…한 것으로 알려졌다’는 식의 무책임한 오보의 양산으로 이어진다면 자칫 정상회담 자체는 물론 남북 관계의 앞날에까지 예기치 못한 악영향을 줄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발목잡기식 보도도 선정주의 못지 않게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일부 언론은정상회담관련 보도를 하면서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깎아내리거나 경제난에 처한 북한의 자존심을 자극할 수 있는 해설기사를 싣기도 했다. 남과 북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문제를 풀어나가려는 마당에 언론이 냉전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통일의 길은 그만큼 멀어질 수 밖에 없다.
독일이 통일의 결실을 맺기까지는 게르만 민족의 환호와 기대 속에 첫 정상회담을 가진 뒤로도 20년을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 남북 정상회담을 일회성 이벤트로 끝내지 않기 위해서는 민족통일의 여정을 차분하고 일관된 자세로 지켜보는 언론의 소명의식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모든 언론매체가 한결같이 사시를 통해 표방해온 ‘민족통일의 견인차 역할’을 이번만큼은 부끄럽지 않게 실천해주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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