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재 중앙일보 이코노미스트 기자
지난 96년 실시된 15대 총선 투표자조사는 우리 방송사에 3대 오보로 기록될 만한 사건이라는 지적을 받았다.그리고 4년,4.13 총선 방송사 출구조사에 다시 ‘엉터리’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방송사들이 이번에도 경쟁후보간 예상 득표율 차가 오차범위 이내인 지역에서 당락을 가르는 모험을 했다는 것이다.4년 전 그 날도 방송사들은 오차범위 안에 있는 조사결과를 근거로 승패가 판가름난 것처럼 확정적인 보도를 했었다.100표 이내로 당락이 갈린 선거구가 4곳이고,1000표 이하로 갈린 곳은 무려 15곳이나 되는 상황에서 이런 시도가 얼마나 무모했는지는 두 말할 나위가 없다.방송사들의 거듭된 실패는 대전 유성에서 민주노동당의 이성우 후보가 최선을 다해 시종일관 깨끗한 선거운동을 벌인 끝에 거둔 ‘아름다운 패배’가 아니었던 셈이다.
한 조사회사 사장은 실패의 구조적인 원인으로 조사회사들의 과욕을 첫손꼽았다.출구조사의 경우 투표소당 3∼4명의 훈련된 조사원을 투입해야 한다고 볼 때 한 조사회사가 5개 지역구를 초과해 조사를 실시하는 것은 애초에 오버로드라는 지적이다.극단적으로 말해,이번에 조사결과가 적중했다면 코끼리가 뒷걸음질치다 쥐 잡은 격이다.
자격있는 조사회사들이 모두 매달려도 전 지역구를 커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마당에 방송사들이 경쟁적으로 출구조사를 했으니,낭비는 차치하고라도 원천적으로 오차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이 때의 오차는 이른바 비표본오차이다.표본오차에 반영되지 않고,그래서 그 크기를 잴 수조차 없는 오차다.엉터리로 한 조사 결과를 놓고 표본오차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는 또 지역구당 30개가 넘는 투표소 중 샘플링된 7∼10곳에만 조사원을 배치한 점도 오차를 가중시켰을 것으로 추정했다.전 투표소를 커버하는 전화조사라면 발생하지 않았을 문제이다.출구조사 역시 그 나름대로 약점이 있다는 것이다.
15대 때와 마찬가지로,어떻게 보면 체계적으로,여당 당선자는 실제 결과보다 많고 제1 야당 당선자는 적을 것으로 예측됐다는 점에서 다른 후보를 찍고도 여당 후보를 찍었다고 답한 응답자들이 적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그렇더라도 이번 실패를 응답자 탓으로 돌릴 일은 아니다.출구조사는,조사회사가 그렇듯이 응답자들로서도 익숙지 않다.
투표까지 하고도응답을거부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하고,응답내용에 대한 비밀 보장은 기술적으로 어떻게 할 건지,조사회사들은 이번 조사를 첫 케이스로 출구조사에 대한 경험을 쌓고 조사기법도 개발해야 할 것이다.
중앙선관위는 선거 때 한시적으로 여론조사심의위원회를 두는 방안을 검토중이라고 한다.자율 정화 능력이 없어 보이니 타율적으로라도 규제를 해야겠다는 발상이다.더 걱정스러운 것은 언론사들이 “여론조사가 나타났다”고 아무리 외쳐대도 사람들이 믿으려 들지 않는 상황이다. 조사회사 사장은 4년 전을 돌이키며 벌써부터 조사업계 전체에 미칠 파장을 우려했다.
혹시나 조사회사와 방송사들이 다음 (총선)출구조사까지는 4년이라는 긴 시간이 남았다며 ‘망각의 힘’에 기대려 들지 않을까 모르겠다.이번에 KBS.SBS 공동조사에 참여한 코리아리서치와 미디어리서치는 4년 전 투표자조사 때도 각각 9곳과 7곳에서 그릇된 당선자 예측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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