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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김충식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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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빙점’을 읽으며 문학에 눈을 뜨고, 헤밍웨이의 속도감에 열광했다. 청년이 된 그의 손에는 ‘무기여 잘 있거라’ 대신 펜과 수첩이 쥐어져 있었다.
바로 국내 최고의 일본전문 기자로 꼽히는 동아일보 김충식(54) 논설위원이다. 그는 신동아에 연재했던 ‘열도의 한국 혼’을 보완·집대성한 ‘슬픈 열도-영원한 이방인 사백년의 기록’(효형출판 펴냄)이라는 맛깔스런 책을 최근 선보였다. 문학을 사랑하던 소년은 왜 일본이라는 존재에 빠져들었을까.
80년대 초 한일 언론인 교류가 한창이던 때. ‘뜻을 세울 나이’가 된 ‘김 기자’는 일본 땅을 밟았다. 손짓발짓으로 수습했던 불편을 잊지 못해 일본어를 조금씩 배워나갔던 게 시작이었다. 그 후 김 위원은 동아일보 일본특파원, 도쿄지사장을 거쳤다. 일본 동경대 대학원에 드물게 객원교수로 초빙돼 1년 동안 강의를 맡았다. 아사히신문 등에 일본인들의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칼럼을 실어 필명을 날렸다.
일본에서의 나날은 그에게 새로운 화두를 줬다. 바로 ‘재일동포 문제’ 였다. 그들의 삶 속에 똬리 친 우리의 아픈 역사와 마주쳤다.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인만 해도 5만 명. 한일합방까지 치면 헤아리기 힘들다. 그 속에는 변절의 아픔에서 파멸의 비극까지 여러 군상들이 있었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파란만장한 삶은 기자 본능을 자극했다.
‘슬픈 열도’를 수놓은 최익현, 역도산, 이진영, 김달수, 이회성 등 열사람의 삶은 김 위원의 손을 통해 다시 생명을 얻었다. 유력한 차기 총리 아베 신조가 한국계라는 ‘특종’은 그 과정의 전리품이다. 특히 김옥균의 궤적은 그를 매료시켰다. “중국과 러시아, 해외열강이 각축전을 벌이던 한반도의 격동기를 관통한 고독했던 청년 혁명가.” 김 위원은 그를 이렇게 정의하며 “김옥균의 개혁이 성공했더라면 우리가 일본에 합방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일본이라는 회화를 날카로운 터치로 그려온 그는 “독도문제는 사실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한 일본 외무성 관리의 말을 빌어 “영토문제는 전쟁이 아닌 한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외교를 할 수 밖에 없다”고 설파했다.
독도는 한일 어느 쪽도 양보를 할 수 없는 문제. “과거 역사를 통해 감정적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고 치밀한 계획 아래 주변국을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며 일본 전문가로서 나름의 해석을 가했다.
베스트셀러 ‘남산의 부장들’의 산파이기도 한 김 위원은 취재를 거부하는 김계원 전 중앙정보부장의 집 앞에서 잠복했다 인터뷰를 성사시킨 일화로도 유명하다. 기자생활 삼십년을 앞둔 이 베테랑은 나름의 기자관을 그리며 초여름의 빗줄기 속으로 사라져갔다.
“기자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직업입니다. 그러려면 의식이 맑아야 하고, 치밀해야 하며 자기 관점보다는 ‘에비던스’(증거)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렇게 길게 보면 역사에 한 점의 변혁을 부여할 수도 있는 것이죠. 그것이 기자의 보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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