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기] 접대부 살해 미군 수사

경찰, 범인을 상전 모시듯 보호, 그늘진 신분탓에 유족들도 분노조차 안으로 삼켜

박병일 SBS 8시뉴스 담당 기자





이태원 살인 사건의 용의자 크리스토퍼 매카시 상병이 CID(미군범죄수사대)에 검거돼 조사를 받던 지난 22일, 경기도 벽제 화장장에서는 죽은 김씨의 장례식이 쓸쓸히 치러지고 있었다. 죽은 딸의 신분을 염두에 둔 탓인지 취재팀과의 대화를 한동안 꺼리던 아버지는 유일하게 장례식장을 찾아준 취재팀의 성의에 화답하겠다며 결국 인터뷰를 허락했다. 속초에서 생선장사를 하는 어려운 살림살이 탓에 네 딸 중 맏이인 그녀가 유독 고생이 많았다며 말문을 연 아버지는 갑작스런 딸의 죽음만큼이나 미군 범죄에 대한 당국의 무성의에 울분을 토해냈다. 세살바기 손주 녀석이 장성하면 엄마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취재팀에게 되묻기도 했다. 윤금이, 신차금, 이정숙... 속칭 ´미군 언니´들의 죽음은 그들의 그늘진 신분 탓에 억울한 죽음 앞에서조차 가족들을 자유롭지 못하게 했다. 그들의 죽음을 애써 외면해 온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또하나의 구속이었다.



다음날 매카시 상병은 용산서에 잠시 인계됐다. 아니 모셔졌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30여 명의 의경들이 배치되고 포토라인까지 설치됐다. ´초상권이 침해되거나 신체 위협이 느껴지면 곧바로 돌아가겠다´는 CID의 엄포(?)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정당한 요구였다. 다만 수갑에다 포승줄까지 둘둘 감은 채 개 끌리듯 끌려오는 우리네 살인범에 대한 잘못된 체포 관행에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그것은 분명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예우였다. 그러나 현장 검증의 원활한 진행을 돕기 위해 각 언론사 취재팀이 자발적으로 구성한 풀 기자단조차 미군과 우리 경찰의 강압에 의해 힘 없이 쫓겨날 때는 아무리 중립성과 객관성을 지키려 애써도 치밀어 오르는 분을 삭힐 수 없었다.



매카시 상병은 ´혐의를 모두 인정했다´는 그 동안의 보도 내용과 달리 과실치사를 줄곧 주장했다. 성 행위 도중 목 졸리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아 그녀의 오르가즘을 충족시키다 보니 죽음에 이르게 됐다는 매카시 상병의 주장은, 방송 이후 다소 바뀌어 살인을 인정하는 쪽으로 기울었다고 경찰은 전했다. 그의 입장이 재판정에서 또다시 어떻게 바뀔 지 몰라도 일단 혐의가 인정된 만큼 중형을 면치 못할 것으로 믿는다. 연간 500여 건의 미군 관련 범죄 가운데 3% 안팎에 불과한 우리의 사법권 행사율을 적어도 0.2%나 높이게 됐다.그러나윤금이 씨를 죽인 마클 이병의 난동 이후 비싼 세금을 들여 교도소를 미국 수준으로 개선한 것처럼 매카시 상병을 위해 국민 혈세가 또 쓰일 지도 모른다. 이태원 버거킹 살인 사건의 용의자 재미교포 에드워드와 미군속 페터슨처럼 몇 년 후 8.15 특사로 풀려나 버릴 지도 모른다. 기자의 이런 억측이 단순히 감정 섞인 푸념으로 끝나길 바란다.



IMF로 어려워진 살림살이를 견디다 못해 동거남과 세살바기 자식 녀석을 뒤로 한 채 서울 한복판 술집 골방까지 흘러들어 몇 만 원의 화대를 대가로 최후를 맞아야 했던 김씨의 억울한 죽음이 불평등한 SOFA규정에 묶여, 그리고 사회적 무관심 속에 묻혀 개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딸의 화장이 끝날 즈음 아버지가 바싹 타들어간 입술 사이로 소주잔을 털어 넣으며 기자를 붙들고 외치던 소리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미국 국민이 1등 국민이면 우리 국민은 쓰레기 국민이냐 이 말이야. 맞아 죽어도 말 한 마디 못하고..." 박병일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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