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7년 일어난 이른바 ‘세계일보 사태’.
경영진의 편집권 간섭과 인사전횡, 부당노동행위로 촉발된 당시 사태는 81일간의 파업과 94일간의 철야농성으로 이어지며 언론계와 노동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계속되는 조합원들의 천막농성과 단식투쟁속에 사측이 용역회사 직원들을 투입시켜 농성장을 유린하고 사장이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출근하는 장면은 아직도 많은 언론인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당시 투쟁을 일선에서 지휘하던 집행부에는 ‘턱수염’과 ‘멜빵’으로 통하던 한 명의 투사가 있었다. 조민성 화백. 조 화백은 세계 사태 당시 부활된 노조의 사무국장과 협상팀장을 맡아 세계사태 내내 대열을 주도하게 된다. 조대기 당시 노조위원장, 조정진 당시 기자협회 지회장과 함께 이른바 ‘쓰리 조’라 불리기도 했다.
조 화백이 이달부터 만평 ‘세계그림판’으로 세계일보에 복귀했다. 해고사태로 인해 회사를 떠난지 6년만이다. 조 화백은 지난 2000년 원직복직판결을 받은 뒤 2002년 초 무보직으로 복직, 지난 2월부터 주1회 만평을 선보여 왔으며 지난 1일부터 세계일보의 만평란을 전담하게 됐다.
제일경제신문을 거쳐 지난 96년 세계일보에 공채로 입사, 4컷 만화 ‘허심탄’을 통해 성역없는 만평을 그리던 조 화백은 서서히 조여오는 경영진의 검열과 통제에 많은 가슴앓이를 했다. “자유로운 창작에 몰두할 수 없었죠. 더욱 힘든건 어느샌가 스며든 자기검열이었습니다”
해직으로 인해 세계일보의 고정란을 잃었지만 조 화백은 외부에서 창작활동을 계속했다.
먼저 ‘카툰플라자’라는 인터넷 회사를 차려 만평과 애니메이션 등 만화 전반에 대한 아이템을 개발, 서비스하는 ‘사업’을 펼치면서 신동아와 스포츠서울, 디지털타임스 등에 꾸준히 만평을 연재했다. 지난 2001년에는 젊은 후배 작가들과 함께 전국시사만화작가회의를 창립하기도 했다.
지난한 투쟁 이후 6년. 자신의 친정에서 다시 자신의 만평과 이름을 되찾은 조 화백은 초심을 잃지 않겠다고 말한다. “만평창작은 자유로워야 합니다. 작가 각자의 영역이 있어야 하고요. 평가는 독자가 내리는 거죠. 신문 입맛에 따라 가는 만평은 그 가치가 없다는 생각 지켜나가야죠. 그래야 복직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한나라당 특검주장과 송영진 의원 카지노 도박을 놓고 만평소재를 저울질 하던 조 화백은 끝으로 한마디덧붙였다.
“외국의 만평은 오래전부터 ‘생활’쪽으로 옮겨갔습니다. ‘정치’에 만평의 소재가 머무르고 있는 우리나라도 만평가들이 다른 소재를 고민할 수 있는 때가 어서 왔으면 합니다”
전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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