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를 켜며] 불신을 넘어서

방송미디어 담당 기자들을 만나 '방송법'하면 정말 '악' 소리를 낸다. 정권이 바뀌면, 협상대상이 바뀌면, 해가 바뀌면 방송법을 둘러싼 각자의 입장이 바뀌고 다시 처음부터 논의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수도 없이 겪었기 때문이다.



지난 8월 국회 막바지, 정치권이 거의 합의에 이르렀다가 엇나가는 대목에서는 심지어 오륙 년 이상 '풍상'을 겪어 쉽게 일희일비하지 않던 베테랑 정책입안자와 노조운동가들조차도 '악' 소리를 냈다. 한 야당 관계자는 보자마자 '양보심 없는' 여권과 '줏대 없는' 노동, 시민단체 운동가들에 대한 비난을 퍼부어댔다. 여당의 한 정책전문가는 아예 며칠 간 잠적해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한 노조운동가는 '조합원들 볼 면목이 없어 도망이라도 가야겠다'며 쓰게 웃었다.



통합방송법 제정에 대한 이들의 열의는 정말 뜨겁다. 나름의 논리도 정연하다.방송정책권과 방송행정권의 모호한 구분과 책임영역을 지적하는 한나라당, KBS가 자칫 통합방송위원회의 직할방송이 될 것을 염려하는 자민련과 KBS, 방송개혁위원회에서 각 이해단체와 전문가들의 견해를 애써 집대성한 방송법안이 누더기로 전락할 것을 염려하는 국민회의, 방송 정상화를 앞당기기 위해 여러 가지 아쉬움을 참고 여당의 방송법안에 동의한 방송노조와 시민들&.



그런 모습을 보다보면 왜 방송법 개정이 이렇게 오래 지연되고 있을까 의문스러워질 정도다. 합의제 행정기구로서의 방송위원회, KBS 경영위원회 등 쟁점들도 90년 이후 계속 반복해 제기됐던 것들이었다. 학문적 법적 논리적 다툼은 충분히 정리되고도 남을 시간이다. 통합방송법의 조속 처리에 모두들 공감하면서도 왜 통과시키지 못하는 것일까?



어찌보면 문제는 정책에 있는 게 아니라 태도에 있다. 자기 이외의 상대들에 대한 불신과 냉소가 너무 깊다. 불신이 깊을 수밖에 없는 과거를 이해하고 보더라도 그 때문에 들인 시간과 노력의 비용이 지나치게 비싸다. 그것이 불신을 극복하기 위해 들인 비용이라면 이제 충분하지 않을까? 새 천년엔 새 통합방송법이 모두에게 신뢰와 화해의 선물로 주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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