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금융 경쟁력이 후진국 수준에 머무는 배경에는 ‘관치(官治)’가 자리 잡고 있다. 경제학자이자 정치이론가인 앨버트 허쉬만은 “경제발전은 주어진 재원과 생산요소의 최적 분배와 조합보다는, 활용되지 못한 채 흩어져 있는 재원과 능력을 발굴하고 동원하는 데 달려 있다”며 산업국가 발전 과정에서 관치금융의 역할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주류 경제학의 시각에서 보면 관치금융은 자원배분의 비효율을 뜻한다. 저리의 특혜성 자금은 부정부패를 키우는 온상을 제공해 필연적으로 경제개발을 저해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실제 대부분 개발도상국에서 관치 금융은 주류 경제학자들의 경고대로 심각한 폐해를 초래해왔다.
한국에서 금융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은 성공적인 산업화를 이끄는 요인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러나 금융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대신 국가의 ‘보이는 손’에 의해 조정된 결과 금융산업은 경쟁력을 잃었고, 그 대가는 참혹했다. 시장금리보다 낮은 신용이 장기간 제공되는 상황에서 기업들은 상장과 증자를 통한 자금조달보다는 손쉬운 차입을 택했다. 그 결과 기업들의 부채비율이 높아졌고, 경제 불황기에 급격히 부실화되는 ‘뇌관’으로 작용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은 그렇게 잉태됐다. IMF 경제위기 이후 금융자유화가 강도 높게 추진된 이유다.
최근 금융당국이 금융지주 회장의 ‘셀프 연임’에 화살을 날리면서 ‘신관치’ 논란이 일고 있다. 금융위원장과 금융감독원장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번갈아 가며 특정 금융지주 회장의 자진 퇴임을 노골적으로 압박하고 있다.
금융당국의 간섭은 도를 넘는 건 물론 뜬금없다. 김정태 하나금융지주 회장은 하나·외환은행의 화학적 통합을 지휘해 사상 최고 수준의 실적을 올리는 등 하나금융호의 순항을 이끌어왔다. 윤종규 KB금융지주회장은 관치 인사가 불러온 ‘KB사태’를 봉합하고, 잇단 인수합병(M&A)으로 리딩 금융그룹 자리를 탈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같은 금융지주의 수장에게 단 한표의 의결권도 없는 금융당국이 사실상 ‘해고 통보’를 내며 압박하는 형국이다. 당국의 날선 발언에 숨은 저의가 있다는 의심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다.
우리나라에는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2016년 8월 1일 시행)이 있다. 여기에는 이사회의 구성 및 운영의 원칙은 물론 보수 및 보상체계, 임원후보추천위원회, 보수위원회의 구성까지 세세히 명시하고 있다. 이런 제도를 만들고 관리하는 게 금융당국의 임무다. 주먹을 흔들며 특정 인사의 퇴진을 겁박하는 건 명백한 월권이다.
한때 고위 관료가 “관은 치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을 호기롭게 내뱉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이라면 ‘망언’이라는 평가 속에 탄핵 대상이 될 수 있는 발언이다. 최근 금융당국의 인사 월권은 그 때나 다름없는 당국자들의 관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금융산업 발전은 관치금융의 유산 청산을 전제로 한다. 한국의 관치가 네팔이나 라오스 수준에 머무는 한 금융경쟁력도 이들 나라를 뛰어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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