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배우가 대학로 무대에 오르는 이유

[스페셜리스트 | 문화] 김빛이라 KBS 기자

▲김빛이라 KBS 기자

글과 말로 생각을 풀어내는 것은 여전히, 앞으로도 매우 어렵고 고통스러운 작업일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과정이 즐겁고 행복하다고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넘어서기에 어려운 ‘벽’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 학창시절, 글이 좋아 멋도 모르고 작가가 되겠다며 꿈을 간직해오던 나는 지금 카메라 앞에서 글을 말로 풀어야하만 하는 일을 하고 있다. 내용만큼이나 전달력도 중요하기에 생방송이든 녹화든 ‘암기’는 숙명인데, 이 과정이 즐겁지만 또한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약속된 분량만큼의 멘트가 끝나도 여전히 중계 화면이 나를 비추고 있다든가, 생중계 도중 내 시선을 분산시키는 무언가(!)가 갑자기 등장할 때 머릿속이 새하얘진 경험,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암기’라는 숙제를 매순간 해내고 있는 모든 이들이 존경스럽다.


대중들의 사랑을 먹고 산다지만, 매순간 숙명적으로 암기력을 테스트받는 이들은 오죽할까. 취재 현장에 가면 막이 올라가기 전의 배우들의 대본을 눈여겨본다. 영화와 드라마처럼 ‘반복’이 허락되지 않는 연극 무대다. 관객들이 코앞에 있고 상대 배우들과의 호흡을 맞추려면 당연히 극 전체의 대사를 암기해야 할터인데, 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해 대본을 볼까. 대략 2시간짜리 공연이라고 하면, 최소 300마디에서 500마디까지의 대사를 실수 없이 해내야 한다.


‘암기’가 숙명인 삶을 60년 째 살아온 배우를 만나러 대학로 소극장을 찾았다. 정해진 인터뷰 시간 10분 전, 무대 뒤 분장실로 향해 이순재 선생님께 대본을 보여달라 부탁드렸다. 대배우만의 깨알같은 암기비법을 슬쩍 훔칠 수 있을까 해서다. “수 백 마디를 통으로 외는 비법이 분명 있을 것 같은데,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대본집에 시선이 쏠린 내게 돌아온 답은 명쾌했다. “비법 없어요, 열심히 외우는 수밖에.”


“남 잘 때 안자요. 젊을 때는 버스 칸에서도 쉴새 없이 중얼거렸죠. 앞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들이 ‘저 놈 정신 이상한 사람 아닌가’ 이렇게 계속 손가락질했죠. 근데 다른 왕도가 없으니까 그냥 외웠어요, 그때부터.” 연극 무대가 출발점이었던 배우, 젊은시절 관객 앞 ‘생방송 무대’에서의 에피소드를 쏟아내며 회상에 잠겼다. 때로는 관객과 눈이 마주쳐 대사를 잊고, 상대 배우에게 기대어 넘어가기도 했고, 그때의 트라우마에 악몽을 꾸는 일도 몇 년간 반복됐단다.


그렇게 대배우가 된 여든 둘의 노장은 오늘도 생방송 무대를 이끌기 위해 대본을 외우고 있었다. 지난해에는 전국을 돌며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3시간 동안 580마디의 대사를 쏟아냈다. 곧이어 ‘사랑해요 당신’으로 연이어 일주일에 세 번 씩 소극장 무대에 오르고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생방송 연기.’ 굳이 연극을 놓지 않는, 아니 더욱 열심히 매진하는 이유를 물었다. “항상 긴장하죠. 하지만 연극이 모든 것의 기본이기 때문에 내 마지막을 정비하기 위해서 연극을 하는 겁니다. 다섯 번 이상 ‘죄송합니다’ 하면 배우 은퇴하는 거죠.”


마지막을 ‘정비하기 위해’ 무대에 오른다는 말, 그는 스스로가 시험대에 올라서는 작업을 통해 매일이 마지막인 것처럼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장담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다보니 암기력이 급격히 쇠퇴하면 은퇴하는 거죠”라고 되뇌는 그 말 속엔 많은 뜻이 담겨 있었다. 대학로 소극장 무대, 50여명의 관객들과 마주하기 위해 스스로를 정비하고 또 정비하는 노장, 배우 이순재의 무대에 ‘폐막’은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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