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이 남긴 절반의 약속
[스페셜리스트│경제] 곽정수 한겨레 선임기자·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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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정수 한겨레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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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삼성 회장이 11월30일 취임 25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이 회장은 “취임 초 삼성이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절감해 신경영을 선언하고 낡은 관행과 제도를 과감하게 청산했다”고 감회를 밝혔다.
이 회장 취임 이후 삼성이 거둔 성과는 눈부시다. 취임 직전인 1987년 삼성 매출은 17조7000억원이었는데 지난해는 273조원으로 무려 15.4배 늘었고, 순이익은 1230억원에서 20조원으로 164배 늘었다.
재계 1위 삼성의 위상은 세계적이다. 미국 ‘포춘’이 발표한 2012년 글로벌 500대 기업에서 삼성전자는 20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그가 주도한 휴대폰 사업은 스마트폰시대를 주도하며, 애플을 제치고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질주하고 있다.
이 회장은 “삼성을 글로벌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는 취임 약속을 지킨 셈이다. 기업은 창업도 어렵지만 수성도 쉽지 않다.
이 회장은 지난 25년간 끊임없이 삼성에 비전을 제시하고 영감을 불어넣으며 발전을 추동했다. 1993년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며 신경영선언을 한 것이 대표적이다. 남들이 모두 양적 성장에 매달릴 때 과감히 질 위주의 경영을 선언했다. 이 회장은 이후에도 특유의 ‘위기경영’으로 임직원들을 독려하는 뛰어난 리더십을 보여줬다.
하지만 삼성에게는 빛과 그늘이 함께 공존한다. 2007년 비자금 사건으로 창립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 이 회장은 국민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불명예 퇴진했다. 이 회장이 2009년 말 이명박 정부에 의해 단독사면을 받았을 때는 법치주의 훼손 논란이 일었다. 올해 2월부터는 이 회장 형제들 간에 차명주식을 둘러싸고 상속소송이 치열하다. 이병철 회장의 막대한 유산을 제대로 세금도 내지 않고 물려받은 것이 부메랑이 됐다.
여야 정치권은 대선을 앞두고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경제민주화 관련 공약을 쏟아내고 있는데, 그 상당부분은 삼성과 관련된다.
대선후보들은 재벌총수들이 법 위반을 하고도 집행유예로 나오는 것을 막겠다고 공언한다. 4년 전이 아니라 지금 비자금 사건이 터졌다면 이 회장은 실형의 굴레를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박근혜 후보는 공정한 시장경제 구현을 강조한다. 하지만 담합과 공정위 조사방해를 일삼아온 삼성은 ‘시장경제의 반칙왕’이라는 불명예스런 별명을 갖고 있다.
기존 순환출자 금지, 금산분리 강화 등 문재인 후보가 강조하는 재벌 지배구조 개혁의 상당부분도 삼성과 연관된다.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비정규직 차별 철폐, 골목상권 양보 등의 이슈도 무관하지 않다. 삼성이 변해야 경제민주화가 가능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경제민주화는 사회책임경영과 직결된다. 글로벌경제에서 이제 사회책임경영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인식된다. 존경받는 기업이 되려면 뛰어난 경영성과는 물론 법적·윤리적·사회공헌적 책임까지 제대로 해야 한다. 이미 100여 명 이상 드러난 삼성 백혈병 노동자 사건, 무노조경영으로 인해 지금도 삼성 사옥 앞에서 계속되고 있는 삼성 노동자들의 항의시위는 사회책임경영과 거리가 멀다.
이건희 회장은 1987년 취임사에서 글로벌 초일류 기업 달성과 함께 “사회가 기대하고 있는 이상으로 봉사와 헌신을 적극 전개하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이건희 회장의 약속은 절반만 지켜진 셈이다. 이 회장은 취임 25주년을 맞아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내년은 신경영 선포 20주년이다. 삼성이 진정으로 존경받는 글로벌 초일류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제2의 신경영 선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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