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보다 중요한 물신 숭배로부터의 해방

[스페셜리스트│지역] 김훤주 경남도민일보 기자·갱상도 문화학교 추진단장


   
 
  ▲ 김훤주 경남도민일보 기자  
 
경남 의령에 갈 일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독립 운동을 한 백산 안희제 선생과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물리친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 두 분 생가를 찾아서였다. 그런데 가장 먼저 눈에 띈 안내판은 ‘호암 이병철 선생 생가’였다.

‘이병철’은 많이 들어봤는데 ‘호암’은 아는 이가 많지 않을 듯 싶다. 뒤에 ‘선생’이라는 존칭까지 붙어 있으니 어쩌면 영웅적 인물로 착각할 수도 있겠다. 알고 보면 삼성 재벌을 창업한 바로 고(故) 이병철 회장이다.

그는 법적으로 직위의 근거가 없는 삼성 이건희 회장의 아버지이고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의 할아버지다.
물론 엄청나게 큰 부자는 하늘이 낸다 하고, 또 그가 바로 그런 엄청난 부자임은 사실이다. 나아가 태어난 집이 기세가 매우 드높고 맥이 좋다는 얘기도 사실로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선생’ 호칭까지 받을 만한 인물이냐는 다른 문제다.

이병철 회장은 박정희 집권 시절인 1966년 사카린 밀수사건을 통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당시 재벌은 누구나 다 그랬다지만 지금껏 사회문제를 야기해온 정경유착의 시조격이기도 하다.

또 쌓은 부를 대대손손 물려줌으로써 정경유착과 불법부정조차도 대대손손 이어지도록 만들었다. 이병철-이건희-이재용 일가는 지분이 삼성 전체의 10%도 안 되면서도 순환출자제도와 같은 지배구조로 삼성을 지배하고 있다.

나는 이런 이 회장의 이름 뒤에서 ‘선생’을 떼어내야 한다고 본다. 극존칭 ‘선생’의 속성은, 그렇게 일컬어지는 사람에 대한 끝없는 긍정과 존경이다. ‘호암 이병철 선생’이라는 호칭은 돈을 으뜸으로 치고 전지전능한 신(神)의 자리에까지 올리는 지금 우리 시대 물신 숭배의 생생한 표현일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이름 뒤에서 ‘선생’을 지우는 일은 대통령 선거 따위와는 견줄 수도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우리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물신 숭배에서 풀려나야 이 ‘선생’을 지울 수 있다. 이렇게 유권자가 바뀌지 않으면 대통령은 절대 달라지지 않는다. 자기를 뽑아준 유권자를 거스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자기가 내세운 747 공약을 이룩하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노력은 했다. 이 경우는 유권자에게 더 잘못이 있다. 당시 모든 사정에 비춰보면 ‘7% 경제성장, 4만 달러 국민소득, 7대 선진국 진입’이 불가능함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대부분 유권자들은 ‘그래도 CEO 출신이니까’, ‘그래도 이명박이니까’ 하며 이명박 후보를 찍었다.

문제도 정답도 여기에 있다. 유권자가 얼마나 바뀌느냐가 중요하지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유권자들이 ‘돈만 된다면 무엇이든 다 좋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상, 재벌을 옹호하는 박근혜 후보는 물론 재벌을 짐짓 비판하는 문재인, 안철수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왜냐고? 권한(權)이 있는(有) 유권자니까. 주인이 바뀌지 않았는데도 이를 거스르고 앞장서 바뀔 머슴은 없으니까. 적어도 지금은, 유권자 대다수가 가장 가치롭다고 여기는 존재나 개념을 손쉽게 짓밟고 깨부술 배짱은 누구에게도 없으니까. 이는 유권자가 물신을 숭배할 때도 마찬가지다. 김훤주 경남도민일보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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