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계 큰 스승' 리영희 선생 별세

15일 지병으로 타계 … 빈소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 故 리영희 선생.  
 
언론계의 큰 스승인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5일 별세했다. 향년 81세.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에서 지병으로 투병 중이던 리영희 선생은 이날 오전 0시 30분께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빈소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차려진다.

선생은 1929년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태어나 57년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로 언론인의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군부독재 등에 반대하던 '실천적 이성', '실천적 언론인'의 삶은 모두 4번의 해직과 5번의 구속이 말해주듯 치열한 투쟁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1964년부터 1971년까지 조선일보와 합동통신 외신부장으로 일했으나 1969년에는 베트남 전쟁 파병 비판기사를 썼다가 조선일보에서 쫓겨났고, 1971년에는 ‘군부독재ㆍ학원탄압 반대 64인 지식인 선언’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합동통신(연합뉴스의 전신)에서 해직됐다.

한양대 교수로 재직하던 1976년과 1980년에도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신군부의 압력으로 각각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특히 1980년 신군부가 ‘광주소요 배후 조종자’ 중 한 명으로 그를 투옥시켰을 때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리 선생을 ‘메트르 드 팡세’(사상의 은사)라고 불렀다.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당시에는 이사 및 논설고문을 맡았으며 1989년 방북취재를 계획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ㆍ기소돼 징역 1년6월을 선고받고 1백60일간 복역하기도 했다.

'전환시대의 논리'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우상과 이성' '베트남 전쟁' '자유인ㆍ자유인' '스핑크스의 코' '동굴속의 독백' '21세기 아침의 사색', 회고록 '대화'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우리 시대를 창출한 가장 아름다운 문화재”라는 김언호 한길사 대표의 말처럼 리영희 선생은 언론계의 보배이자 우리 사회의 큰 스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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