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표한 ‘긴급조치 판결분석 보고서’는 유신시대 엄혹했던 과거사를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독재를 비난하고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재야 인사는 물론 술김에 울분을 터뜨리고 박정희 대통령을 비난한 필부들까지 긴급 조치의 족쇄를 피하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군사정권에 의해 자행된 폭거에 우리 언론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사회 지도급 인사는 숨을 죽이고 말을 아꼈다. 부끄러운 우리 현대사의 단면이다. 거기에는 사법 정의를 부르짖는 판사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 눈에 봐도 국민의 기본권을 짓밟는 초 헌법적인 법률이었지만 판사는 오로지 법으로만 말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힘 없는 민초들에게까지 터무니 없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그들을 문제 삼으려는 시도는 지금껏 거의 없었다. 그저 꾹 참는 게 익숙했고 또 먹고 살기 바빠 가급적 잊어버리려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십 년의 세월과 함께 망각의 장막 뒤에 숨어서 소위 잘 나갔던, 아니 지금도 한 자리씩 차지한 채 잘 나가는 그들의 과거가 비록 부분적이긴 하지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더 나아가 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특별법 제정까지 거론되고 있다. 만시지탄이지만 적극 환영할 만 하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마녀 사냥식 여론재판을 경계한다”는 의견부터 “정적 제거를 위한 정치 공세”라는 주장까지 들린다. 자칭 타칭 유력 언론들이 큼지막한 활자로 우려를 나타내고 상당히 높은 지지율을 보이는 유력 대권 주자까지 가세하는 형국이다.
이들의 속내를 아주 짐작 못할 바는 아니지만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이유는 이미 지나간 아픈 과거를 굳이 들추지 말고 화해하고 용서해 사회통합을 이뤄내자는 것이다. 틀린 얘기가 아니다 보니 아직 완전한 정보를 접하지 못한 대다수 국민들은 혼란스러울 뿐이다.
문제는 이해 당사자가 된 판사 집단의 행태다. “할말이 없다” “기억이 안 난다” “경험이 일천한 배석판사여서 판결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등의 변명으로 일관하거나 굳게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다른 일부 법조인들은 과거의 판결을 되짚게 되면 법적 안정성이 깨진다거나 재판의 독립과 법관의 독립을 깨뜨리는 행위라는 등의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천 명을 훌쩍 뛰어넘는 피해자들이 긴 긴 세월 억울하게 고통 속에서 신음했고 그 중엔 명예회복도 하지 못한 채 세상을 뜬 사람까지 있지만 ‘양심의 울림’을 외면해 죄스럽다는 반성의 목소리는 어찌된 일인지 대상 판사 4백92명 그 누구에게서도 들려오지 않는다.
물론 암울했던 시대적 특수성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래서 화해와 용서를 통한 상생의 미래를 만들어 가자는데도 적극 동의한다. 하지만 백번 양보해 왜곡되고 굴절됐던 현대사의 또 다른 희생양이라는 면죄부를 주려고 해도 그에 맞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적어도 지금까지는 눈에 띄지 않는다.
화해와 용서는 원칙도 없는 온정과 관용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번지르르한 자기변명이 아닌 통절한 자기반성이 있을 때 가능하다.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웅크린 채 세월이 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친일과 군사정권의 잔재. 이를 제대로 청산하고 오욕으로 점철됐던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은 역사의 당위요, 시대적 소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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